《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2쇄를 출판하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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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 조회 2,233회 작성일 23-04-14 16:08본문
--121쪽 네 번째 줄에서 열다섯 번째 줄
이사할 집을 구하지 못한 헐버트는 1898년 가을 정부로부터 휴가를 얻어 가족을 미국으로 데리고 갔다. 일본을 거쳐 배편으로 태평양을 건너, 5년 만에 미국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유수 잡지 《포럼The Forum》과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에 접촉하여 대한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관한 자신의 기고문을 실어 달라고 요청하여, 내락을 받아냈다. 또한, 영국 런던을 방문하여 ‘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로부터 회원 자격을 약속받았다. 영국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헐버트는 가족을 남겨둔 채 1899년 초 홀로 서울로 귀환하고, 가족들은 가을에야 합류했다. 헐버트 가족은 선교사 빈튼Charles C. Vinton 집에서 임시로 기거하다가 1900년 지금의 회현동 지역인 남산 밑자락에 집을 구해 이사했다. 이어서 1903년 바로 인근에 새롭게 집을 지어, 1907년 서울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127쪽 첫 번째 줄에서 아홉 번째 줄
한편, 허재영 교수는 2020년 발표한 논문 <근대 지식 수용 과정에서 헐버트 시리즈 교과서의 의의>에서 앞서 소개한 《초학지지》, 《사민필지》, 《대한력사》와 1907년 밀러M. H. Miller가 저술한 《미국ᄉᆞ긔》, 1908년 베어드W. M. Baird가 저술한 《텬문략》, 1908년 베어드 부인Mrs. W. M. Baird이 번역한 《리학초권》, 밀러 부인이 번역한 《동물학》(1906)과 《식물학》(1909) 등 8권이 헐버트교과서시리즈로 출간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허재영은 헐버트교과서시리즈는 근대 지식 보급을 위해 모든 분야의 학문을 대상으로 기획된 점, 순 한글로 출판한 점, 교수법 및 학습방법을 위해 묻는 말을 넣은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주장하였다.
--129쪽 여섯 번째 줄에서 열 번째 줄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Horace H. Underwood에 따르면 이때 헐버트 부인이 학생들에게 강조한 3 ‘R’은 당시 공부했던 선교사 2세대들에게 소중한 인생 교훈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3 ‘R’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헐버트 부부의 성향으로 보아 ‘read’, ‘respect’, ‘responsibility’라고 추측해 본다.
--210쪽 세 번째 줄에서 다섯 번째 줄
헐버트는 또 격조 높은 한국의 상투는 기자箕子가 기원전 1122년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오기 전부터 존재했었다고 주장했다.
--221쪽 열 번째 줄에서 열여섯 번째 줄
헐버트의 바른 역사관에 감동
많은 한국인 학자들이 헐버트의 한국사 탐구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헐버트의 역사관에도 감동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현대에도 맹활약했던 교육자이자 법학자요, 역사학자였던 최태영(1900~2005)은 “헐버트는 나에게 바른 역사를 복원할 생각을 가지게 한 사람 중 하나다.”라며 헐버트의 바른 역사관에 감동하여 역사학에 열중하였음을 글로 남겼다.(《나의 근대사 회고, 최태영전집1》, 눈빛, 2019, 98쪽)
--269쪽 네 번째 줄에서 여섯 번째 줄
《뉴욕타임스》는 헐버트와의 회견 기사에서 이때 헐버트가 명의를 이전받은 부동산 규모가 5만 에이커acre나 되었다고 보도했다(《뉴욕타임스》 1905년 12월 14일 자).
--411쪽 스무 번째 줄에서 스물세 번째 줄
한편, 홍일식 전 고려대학교 총장은 헐버트가 서울에 도착하는 날 당시 중학생으로서 서울역 앞 연도에 나가 수많은 학생, 시민들과 함께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헐버트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증언하였다.
--420쪽 여덟 번째 줄에서 열다섯 번째 줄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군사용이라며 일제에 의해 집이 헐리고 보상도 받지 못한 어느 부인이 태어난 지 3일밖에 안 된 아이를 헐버트 집 앞에 놓고 갔다. 부인이 아이를 놓고 간 것은 헐버트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아이를 잘 보살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헐버트는 이러한 비극적 현실이 너무 슬퍼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헐버트는 가난한 자가 죄를 지으면 죄를 탓하기 전에 왜 그가 죄를 지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439쪽 열여덟 번째 줄에서 스무 번째 줄
《자유신문》은 1950년 3월 1일 자에서 헐버트를 포함한 미국인 11명과 영국인 1명(베델), 도합 12명에게 장면 주미대사를 통해 서훈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상 총 18쪽
또한, 2쇄 가격은 1쇄보다 3,000원이 오른 25,000원입니다. 이는 최근 물가 급등으로 인해 종잇값이 2019년에 비해 무려 60%가 넘게 올라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에 앞으로도 많은 성원을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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