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조선의 콜레라와 오늘의 메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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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 조회 3,334회 작성일 20-11-10 10:57본문
존경하는 회원님들께,
메르스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죠.
다행히 약간은 진정되고 있지 않은가요.
어쨌든 우리는 생업에 전념하고 더욱 더 힘을 내야겠지요.
본 기념사업회는 헐버트 박사님이 조선 시대에 쓴 논문 및 기고문 52편을 번역하여 곧 <헐버트 논문 모음>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이 책에 포함된 매우 흥미 있는 글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박사님은 1886년 7월 5일 조선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서울에 콜레라가 만연하여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가 세운 정규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 개교에 전념하셨습니다(9월에 개교). 그런데 콜레라로 인한
참상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박사님은 미국 등 모든 나라가 이러한 전염병에 미리 대비해야 하고, 이같은 참상은 다시 있어서는
않된다는 생각에 서울의 콜레라 소식을 미국 신문에 기고하셨습니다. 박사님은 7월 29일 원고를 작성하여 미국 신문에 송고하였습니다.
130년 전에 박사님이 목격한 조선의 참상이 요즈음의 메르스 사태와 묘하게 오버랩되네요. 박사님의 글과 요즈음의 메르스 사태에서
무언가 분명한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글의 일부를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댁내 모두가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홍보실
“7월 15일부터 25일 사이에 도성 안에서만 3,140명이 죽었다. 이때 정부가 내린 유일한 조치는 시체를 내다버릴 수 있는
두 개의 문에 관리를 파견하여 시체의 숫자를 세는 일이었다. 콜레라로 죽은 사람의 시체는 모두 죽는 날 당일에 바로
치워졌다. 3,140명의 사망자는 도성 안의 숫자이며 도시 전체 사망자의 절반에 해당한다. 도성 밖의 사망자도 엄청났다.
열흘 동안에 서울에서 콜레라로 죽은 사람은 하루에 평균 628명, 도합 6,280명이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26일 하루에만
보고된 도성 안 사망자는 460명이며 도시 전체로는 920명이다. 27일에는 842명이다. 18시간 동안에 1,762명의 장례를
치렀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왜 그들은 콜레라를 피해 도망가지 않았냐고?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정부의 업무는
마비되었다. 무엇에도 희망을 걸 수 없는 상황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정부의 모든 부서는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콜레라가 그들을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다. 20건의 발병 중 19건이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콜레라 자체는 그렇게 치명적인 병이 아니다. 잘 보살피고 치료를 서두르면 치사율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관습이 희생을 반으로 줄일 수 있는 희망을 앗아갔다.
사람이 집 안에서 죽으면 매우 불길한 징조로 여기는 미신을 조선인들은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사람이 아프면 아픈 사람을
날씨와 상관없이 문 밖으로 내친다. 병자는 짚으로 만든 거적에 누워 있거나, 거적도 없이 맨땅에 방치되기도 한다. 그들은
뜨거운 햇볕이나 대기에 노출되어 병세가 더 악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약을 주거나 정성어린 치료로 병자를 돌보아야 할
시점에 병자는 오히려 죽음의 턱밑으로 내몰린다.
어제 아침 나는 소의문에 가 매장을 위해 성 밖으로 치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체를 목격했다. 일일이 시체를 세어보니
100여구가 되었다. 이어서 소의문 밖을 지나며 이 지역 전체가 공동묘지로 변한 것을 보았다. 언덕 꼭대기까지 모든 땅이 묘지였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참상이 있으랴. 급하게 매장을 하다 보니 매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관도 없고, 시체는 맨땅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채 한 줌의 모래로 살짝 덮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개와 새들이 시체를 서로 먹으려고 다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