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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사 공유합니다. - "한자는 세종 때 버렸어야" 130년 전 한탄한 외국인 한글학자 헐버트 [이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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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 조회 3,048회 작성일 20-11-1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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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2020.11.3.자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내용이 좋아 공유하고 싶습니다. 


PICK 안내
[경향신문]
초대 왕립육영공원 교사인 호머 헐버트는 1889년 뉴욕에서 발행되는 <뉴욕트리뷴>에 ‘한국어(Korean language)’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한글에 매료된 헐버트는 “한글의 모음은 하나 빼고 모두 짧은 수평, 수직의 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면서 기고문에 직접 ‘ㅏ ㅗ ㅣ ㅜ’를 그려 표현했다.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한글을 자모까지 그려가며 언어학적으로 분석·소개한 이가 바로 서양인 헐버트였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한자 대신) 한글로 쓰면 선비와 백성, 남자와 여자 누구나 널리 보고 쉽게 알 수 있을 것인데, 사람들은 도리어 한글을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어째 글 내용이 심상치 않다. 꼭 훈민정음 서문의 느낌이 난다. 다음 내용을 보면 더욱 알쏭달쏭해진다.

“이런 이유로 필자가 비록 조선말과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어리석은 외국인이지만 부끄러움을 잊고 특별히 한글로 세계 각국의 지리와 풍속을 대강 기록하려 한다.”

호머 헐버트가 펴낸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 <사민필지>(1891년). 헐버트는 배우기 쉬운 한글을 업신여기는 조선의 풍토를 안타까워하면서 각국의 지리 뿐 아니라 천문 지식은 물론 각국의 정부형태, 사회제도, 풍속, 산업, 교육, 군사력 등을 개괄한 세계지리서인 <사민필지>를 썼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외국인이 쓴 순한글 세계지리서

보아하니 외국인이 세계지리서를 썼다는 얘기 같은데, 그런 어려운 책을 외국인이 ‘특별히’ 한글로 펴냈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도 한글을 업신여기는 풍토를 안타까워하면서 신분·성별의 구별없이 모든 백성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무엇보다 이 책의 제목이 심상찮다. ‘선비(士)와 백성(民)이 모두 반드시(必) 알아야 할 지식(知)’이라는 뜻의 <사민필지>(士民必知)이니 말이다. 영어로는 ‘Knowlege Necessary for All’이다.

게다가 책이 출간된 것은 자그만치 129년 전인 1891년(고종 28년) 무렵이었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계승한 이 외국인의 이름은 당시 조선의 육영공원 교사였던 호머 헐버트(1863~1949)이다.

놀랄 일은 또 있다. 외국인이 쓴 이 순한글 세계지리교과서는 최초의 순 한글신문인 ‘독립신문’보다도 5년 정도 앞서 발간됐다는 사실이다. 헐버트가 쓴 <사민필지>는 단순한 세계지리서가 아니다.

각국의 지리 뿐 아니라 천문 지식은 물론 각국의 정부형태, 사회제도, 풍속, 산업, 교육, 군사력 등을 개괄했다. 태양계 그림, 세계전도, 대륙별 지도 등 총천연색 그림 및 지도가 9장 포함됐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도량형 표기를 조선식으로 표현했다. 리(거리)와 척(높이), 석(곡물), 원(화폐) 등이다. 서양의 신분 구조도 ‘양반과 선비, 백성’ 등으로 표기했다.

1886년 고종이 세운 왕립육영공원의 초대 교사로 초빙된 호머 헐버트가 학생들에게 대수학을 가르치고 있다.|이돈수·이순우의 <꼬레아 꼬레아>(2009)에서



■“원주민 쫓아내고 세운 나라들” 소개

나라별 대륙별 풍속과 정치상황 등의 특징을 나름대로 콕 찝어내 설명했다.

예컨대 ‘400년 전에 유럽 사람들이 아메리카 땅에 들어가 원래 있던 사람들을 점점 쫓아내고 스스로 큰 나라를 세웠는데 지금의 미국’이라고 설명했다. 또 ‘호주에서는 80~90년전 유럽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땅에 들어가 원래 사람들을 점점 쫓아내고 살았다’고 했고, ‘아프리카 대륙은 50년 전부터 유럽인들이 해변을 빼앗아 살았고 피부가 검은 에티오피아 인종은 다 쫓겨나 내륙으로 들어가 살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민필지>는 나라별 대륙별 역사와 풍속, 정치상황을 객관적으로 소개했다. 예컨대 아메리카에서 유럽인들이 ‘근본있는 사람들’(원주민)을 쫓아내고 세운 나라가 미국이며, 호주,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유럽인들이 붉은 피부 원주민(호주)과 에티오피아 검은 피부 원주민을 내륙으로 몰아내고 차지했다고 설명했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또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을 두고 ‘세상이 이런 좋지 못한 일은 없을 것이며, 세계 각국이 매우 비판하여 오랑캐의 일이 됐다’고 꼬집었다. 또 ‘20년 전부터 영국말이 세계 각국에서 통하는 말이 됐다’고 소개했다. 영어가 세계공용어가 되었음을 설명한 것이다. 영국은 식민지에서 받는 세금이 1년에 20억원이나 된다고도 했다. 러시아를 두고는 ‘나라백성 중에는 국왕을 시해할 계교를 꾸미는 사람이 종종 있다’고 썼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1818~1881)이 혁명세력의 폭탄테러로 사망한 사건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이탈리아를 서술한 내용이 재미있다. ‘인체의 조각은 살아있는 사람 형상과 조금도 차이가 없어 도무지 당할 나라가 없다’고 했다. 또한 ‘이 나라 국왕이 천주교 교황을 자주 구박해서 교황이 천주교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도 생각했다’고 전했다. 터키에 대해서는 ‘계급이 양반과 백성과 종으로 나뉘고 다른 나라에 많은 빚을 진채 갚지 못하고 있다’면서 ‘부인을 3~4명이나 둔다’고 소개했다.

<사민필지>에 실린 유럽지도. 모두 8장의 천연색 지도가 실렸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헐버트는 조국인 미국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미국은 작고 약한 나라라도 서로 조약을 맺었으면 그 나라가 평등한 국가가 됨을 분명히 알게 한다’고 했다. 헐버트는 필시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포함시킨 ‘조선과 미국 중 어느 일방이 부당하거나 강압적인 간섭을 받을 때 원만한 타결을 주선한다’는 이른바 ‘거중조정’ 조항을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직전 미국은 테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지배를 인정했다. 헐버트는 특사자격으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밝힌 고종의 친서를 들고 미국에 갔지만 홀대만 받았다. 미국은 을사늑약 체결 후 공사관을 가장 먼저 철수시킨 나라가 됐다.

배신감을 느낀 헐버트는 훗날 “미국은 한국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삿말도 없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사민필지>에 소개된 세계각국의 상황. 이슬람국이던 터키는 일부다처제를, 영국은 20여년전에 영어가 세계공용어가 된 것을, 중국(청나라)은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패함에 따라 아편을 막지못한 사연을, 이탈리아는 국왕이 교황을 ‘구박’하여 교황이 도읍을 옮기려 한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세계지리서를 펴낸 이유

<사민필지>로 돌아가자. 두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헐버트는 왜 순한글로 세계지리서를 쓴 것일까. 또 순한글로 이런 교과서를 펴낼 만큼 헐버트가 한국어에 능통했던 것일까.

헐버트는 1886년(고종 23년) 9월 고종이 설립한 왕립 영어교육기관(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조선땅을 밟은 3명 중 한사람이다. 헐버트는 한국말을, 육영공원의 조선학생 30명은 영어를 한마디로 못했다. 그랬으니 영어 뿐 아니라 자연과학과 수학, 만국지리 등 다른 과목들도 모두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했다. 의도하지 않은 영어몰입식 교육이었다. 헐버트가 “학생들의 영어 구사 능력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극찬할만큼 조선인들의 학습열의는 뜨거웠다.

하지만 헐버트에게는 뭔가 부족했다. 조선의 내로라는 지식인이라도 기껏해야 청·일·러 정도만 단편적으로 알고 그 세 나라가 세상의 전부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조선땅을 밟았던 선교사들은 헐버트의 말마따나 ‘성서번역에만 관심을 둘 뿐’이었다. 헐버트는 조선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서양에서 가르치는 보편적인 지식’이며, ‘그 지식을 담은 근대서적이 필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세계지리서를 편찬할 계획을 세웠다. 헐버트가 원한 것은 일반적인 지리책이 아니었다.

“보통의 지리책이 제공하지 않은 정부와 재정수입, 산업, 교육, 종교, 군사, 식민지 등을 넣었다. 독자들이 세계 각 국가가 이룩한 부, 문화, 힘의 정도 등을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헐버트의 <회고록>에서)

헐버트는 조국인 ‘미국은 작고 약한 나라라도 서로 조약을 맺었으면 그 나라가 평등한 국가가 됨을 분명히 알게 한다’고 썼다. 그러나 훗날 을사늑약 후 한국을 가장 먼저 저버린 미국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한문판으로 번역된 <사민필지>

여기서 헐버트의 진가가 발휘된다. “조선 문자로 책을 출판하여 조선인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폈다. 헐버트는 서양에서 출간된 각종 참고서를 축약하는 방식으로 1년 남짓에 <사민필지>를 편찬했다.(1891년 초 추정) 헐버트는 “이 책은 어떤 국가의 결점도 숨기지 않았고, 100% 사실을 기반으로 썼다. 상상력은 바탕에 둔 것이 없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초를 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민필지>는 이후 각 교육기관에서 인기교재로 쓰였고, 특히나 외국의 정보에 목말랐던 상류층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미 이민사를 연구한 미국인 대니얼 애덤스는 “헐버트의 <사민필지>를 읽고 서방세계에 눈을 뜬 한국인들이 하와이 이민의 결심을 굳히게 되는 주요 동기가 됐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외국인 헐버트가 쓴 순한글 <사민필지>가 4년 뒤인 1895년 총리대신 김홍집(1842~1896)의 지시로 한문으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갑오개혁(1894~96년)으로 ‘언문’이라는 한글의 명칭을 ‘국문’으로 바꾸고, 공식문서에서 한문을 폐지하고 국문(한글)으로 쓰게 했으면서 왜 한글판 <사민필지>를 한문으로 번역했을까. 퇴보가 아닌가. 그러나 좋게 해석하면 그만큼 <사민필지>가 사랑을 받았다는 방증일 수 있다.

헐버트의 <사민필지>가 7~8세 어린아이부터 한글과 함께 세계지리를 아울러 배울 수 있는 교재였다면 한문판 <士民必知>는 한문에 익숙한 지식인층을 겨냥한 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호머 헐버트가 1900년대 초 서울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둘째 딸 마들렌, 셋째 아들 레너드, 헐버트부인, 큰딸 헬렌, 둘째 아들 위리엄, 헐버트, 큰아들은 일찍 사망했다. |헐버트기념사업회 제공


■한글과 사랑에 빠진 외국인

두번째 궁금증이 나온다. ‘한글로 책을 출간하겠다’는 의욕은 높이 살만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순한글 교과서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헐버트의 열정이 여기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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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용은 아래 기사를 참조해 주세요.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3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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