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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헐버트의 ‘중국 민중에 한글보급’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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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 조회 2,974회 작성일 20-11-1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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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역사]100년전 헐버트의 ‘중국 민중에 한글보급’ 아이디어
2011 04/12ㅣ주간경향 920호

ㆍ한글 우수성 불구 탄생 배경·소통기능 중시 ‘세종 뜻’ 기려야

한글은 요즈음 심각할 정도로 대량생산되고 있다. 요즘처럼 한글이 흔해진 적이 있던가? 한글은 휴대폰을 타고, 이메일을 타고, 소셜네트워크를 타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왕래한다. 우리가 날마다 발신·수신하는 한글에 형체를 입혀주면 아마도 수천만 마리 개미가 떼지어 옮겨가고, 수천만 개 풀씨가 바람에 흩날리고, 수천만 개 야구공이 그라운드를 구르는 것보다 더욱 기괴한 장면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 학교에서 현지인 이바딘씨가 한글로 표기된 교과서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신문



첨단 매체를 타고 어지럽게 들락날락하는 한글 정보는 그럴듯한 유언비어를 만들어내기 일쑤다. 최근 초등학교 4학년 도덕 교과서에 실린 한글 관련 내용도 알고 보면 유언비어에서 시작한 것이다. ‘세계 언어학자들이 한글을 세계 공용문자로 선정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뽑았다’ ‘국제연합이 문자가 없는 나라에 한글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 사실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물론 사실에 근접한 면은 있었다. 가령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 부톤섬 바우바우시에서는 현지 찌아찌아 민족의 음성언어를 상대적으로 가장 충실하게 표기할 문자로 한글의 가치를 중시하고 현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한글로 표기한 찌아찌아 국어 수업을 시범적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2009년 발간된 <바하사 찌아찌아>가 그 교과서다. 인도네시아 제민족의 음성언어를 유럽 알파벳으로 표기할 것을 정한 자국 법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세계의 문자적 통일성을 침해하는 위험한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는 조처를 바우바우시 당국이 실험했다는 것은 확실히 한글의 세계적 우수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해석되는 면이 있다.

그런데 한글을 한국 바깥에 문자가 없는 사람들에게 선물해준다는 생각은 근래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100년 전에도 그런 구상이 있었다. 1902년 한국에서 활동하던 헐버트는 중국 민중에게 한글을 보급하자는 깜짝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였으니까 중국 민중이 문자가 없는 사람들이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문자가 있어도 문맹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처음부터 문자가 없는 사람들이나 음성언어에 갇혀 문자언어의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중국 민중에게 한자는 친근감은 있으나 너무나 어려운 문자였고 사실상 문자언어가 없는 중국 민중을 교육하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이 한자를 대신할 문자를 강구하고 있었다.

한자보다 쉽고 알파벳보다 친근감
한자 대신 영어 알파벳을 사용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었지만 헐버트는 결코 이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았다. 영어 알파벳을 새로운 문자로 채택하기 위해서는 중국 민중의 전통적인 문자생활의 전체적인 체계가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어 알파벳은 붓으로 쓸 수 없고, 영어 알파벳은 세로로 쓸 수 없으며, 영어 알파벳을 쓰는 데 꼭 필요한 잉크는 중국의 종이에 사용할 수 없다.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주위를 시민들이 둘러보고 있다. |경향신문

헐버트는 중국의 보수적인 문자생활 습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점에서 한글이 영어 알파벳보다 훨씬 탁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즉 한글은 붓으로 쓸 수 있고, 한글은 세로로 쓸 수 있으며, 한글을 쓸 때 사용하는 한지는 중국의 종이와 성격이 같다는 것이다. 그는 한글로 표기된 한국 한자어의 음절이 중국어의 음절과 같은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어서 한글로 표기된 한 페이지가 한자로 표기된 한 페이지처럼 보인다는 시각적 효과까지 지적하였다. 한자어의 오랜 영향을 받은 한국의 전통적인 어문생활이 도리어 중국의 민중을 구원하는 제일의 경쟁력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당시 중국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에 포위된 가운데 국토 곳곳이 잠식되는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였고, 서양에 적대적인 민중 감정이 확산되면서 반서양, 반기독교 운동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었다. 헐버트는 이와 같은 형세에 비추어 볼 때 한글은 창제 과정에서 중국의 학자가 도왔던 친근한 추억도 있으니까 중국인에게 환영받을 것이라고 보았다. 서양보다는 친근감을 느낄 한국으로부터 중국이 더욱 쉽사리 문자 표기 시스템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헐버트의 아이디어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헐버트 같은 서양인이 중국의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한글 보급을 주장한 것은 그간 잊고 있었던 한글의 중요한 특징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바로 민중의 문자언어로서의 한글, 곧 한글의 민중적인 성격이다. 세종대왕이 어제 서문에서 공식적으로 밝혔듯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무엇보다도 민중 때문이었다. 문자언어가 없는 어리석은 민중들이 말하고 싶은 자기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이러한 목적으로 한글이 창제된 것이었다.


한민족 대표 노래인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 악보로 기록한 호머 H 헐버트 선교사. |경향신문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세종대왕의 본뜻은 결코 민중의 자유로운 문자언어생활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음성언어를 마음껏 문자언어로 표현한다면 개인의 구어적 상상력에 의한 지적 아나키즘이 초래될 것이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않는’ 현실에서 한글은 한자로 적혀 있는 교훈적인 고전과 도덕적인 문명에 민중이 더 가까이 가도록 고안된 교화의 매체였다. 한글은 고전 문명과 조선 민중을 연결하는 소통의 장치였던 것이지, 중국 고전 문명과 결별하고 조선의 고유한 문화적 독자성을 구현하려는 내셔널리즘의 산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글의 진정한 가치 콘텐츠로 발굴
이 문제는 중요하다. 대한제국기에 전개되는 국한문 논쟁은 과연 한글이 한자 없이도 문명을 구현할 수 있느냐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글의 민족적 성격과 실용적 성격이 부각되었다. 한글은 열등한 중국 문명과 결별하는 민족적인 문자이며, 우월한 서양 문명을 수용하는 실용적인 문자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해결된 것 같지 않다.

만약 전 세계의 모든 문자가 멸망하고 오직 한글만 남았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한글만으로도 충분히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한글로 보편적인 문제를 사유하고 있고 한글로 지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가? 한글의 콘텐츠는 가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한가? 한자가 폐지되고 한글만 남았을 때 문명의 멸망을 두려워했던 한문론자의 비관적인 태도가 지금에 와서는 한글의 민족성과 과학성을 예찬했던 국문론자의 낙관적인 태도보다 차라리 더 많은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근대의 그늘에서 벗어나 한글의 진정한 가치를 알파벳에서보다 콘텐츠에서 구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헐버트의 아이디어도, 국문론자의 예찬도, 바하사 짜이짜이도,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도 모두 잠시 내려놓고 세종대왕의 한글 정신을 다시 성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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