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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의 또 다른 특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글 이민원(대한민국역사와미래 연구위원장)

 

서울에 자리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한 묘비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이 무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헤이그의 또 다른 특사였던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이다. 

그는 한국인의 기질과 한국문화를 한국인보다 더 잘 이해하고 높이 평가하였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반세기 동안 헌신한 외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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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필지』 초판본 표지_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좌),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헐버트(왼쪽에서 두 번째)(우)

헐버트, 그는 누구인가

헐버트는 미국의 명문가에 태어나 다트머스대학(Dartmouth College)을 졸업하고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College)에서 수학하였으며, 평생 정의와 인간 사랑을 실천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 그가 19세기 말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고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던 조선 조정의 부름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육영공원과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등 청년학도에게 영어와 수학 같은 근대 서양 학문을 가르치며, 순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 등을 저술한 근대교육의 선구자였다. 

한편 그는 금속활자·거북선·훈민정음 등 한국의 전통문화와 한글의 우수성을 간파하고 널리 알린 한국학 전문가였으며, 일본제국의 왜곡에 맞서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옹호하고 한국의 독립을 도운 한국인의 스승이자 외국인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그러나 헐버트가 대한제국 광무황제의 고문이자 헤이그 특사였던 이상설·이준·이위종의 활동을 결정적으로 도와 한국을 국제무대에 알리고, 일본제국이 강탈한 외교권 회복에 앞장섰던 특사였다는 사실은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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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좌), 광무황제가 헐버트에게 내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증(우)


헤이그 특사로 발탁된 3인과 헐버트

일제는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1905년 광무황제를 핍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광무황제의 서명이 없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조정의 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서명하게 한 불법 문서였다. 이에 광무황제는 국제법을 근거로 이 조약이 무효임을 널리 알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정의와 평화를 구호로 소집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열강의 지원을 구하기에 좋은 기회로 포착되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제정시대의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1899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다. 국제법 창시자인 그로티우스의 모국이란 점이 회의 장소로서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1899년 5월 18일~7월 29일 열린 제1차 회의 당시는 26개국 대표들이 군비축소와 중재 문제를 논의했으며, 중재재판소 설립에 합의를 보았다. 1907년 6월 15일~10월 18일 열린 제2차 회의 때는 40여 개 나라에서 외교관과 군인 등이 대표로 참석하여 전쟁법규의 제정 등을 논하였고, 대한제국은 제2차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광무황제가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한 내용은 분명했다. 일제가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고 강제하여 외교권을 불법 탈취하였으므로 국제법을 위배한 일본을 성토하며, 한국의 외교권 회복을 열망한다는 것이었다. 광무황제는 이상설·이준·이위종 등 3인의 특사 외에 별도의 외국인 특사 헐버트를 발탁하여 중요한 사명을 부여하였다. 하나는 한국이 일본의 압제를 받은 상황과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고 각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 다른 하나는 장기적 목표로서 해외 한인들의 결집과 단체 구성을 독려하여 한국의 주권수호를 위해 노력하는 일이었다. 

헐버트와 3인의 특사는 헤이그에서 각국의 언론과 대표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은 그 자체가 불법이고 성립되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에서 많은 불법을 저질러 왔고 한국에 야만적인 행동을 통해 토지 등을 강탈하고 있다”, “각국은 자유와 정의에 입각해 일본의 불법을 성토하고 한국의 주권수호를 도와 달라” 등이 그것이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헐버트의 활약

헐버트는 각국의 대표와 언론인·평화운동가 등을 접촉하여 이상설 등의 해외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유럽과 미국에서는 국제 언론과 미국 정부를 상대로 활동하였다. 그중 하나가 『뉴욕 헤럴드』 기자와의 회견이다. 그는 ‘황제는 조약에 결코 서명하지 않았다’, ‘한일조약은 결코 조인된 적이 없다’는 제목으로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이유, 일본의 각종 불법 행위, 한국의 절망 등을 전하면서 미국의 일본에 대한 우호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 외에도 헐버트는 일본 제국이 일진회 등을 통해 한국민을 분열시키고 있고, 군사적 필요를 가장하여 토지 가격의 8분의 1 가격으로 토지를 점탈했으며, 모르핀과 주사·아편·도박 등으로 한국인들을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것 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약육강식이 횡행하던 제국주의 시대였다. 한국의 뜻이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란 매우 어려운 시대였다. 영국·미국·러시아 등 서양 강대국과 일본의 외면으로 헤이그에서의 사명은 끝내 달성되지 못했다. 그에 앞서 민영환·한규설 등이 이승만과 헐버트를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접촉해 펼치려던 지원요청도 그런 배경에서 실패하였다. 

광무황제와 헐버트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광무황제는 헐버트 등에게 헤이그에서의 활동 외에 별도 사명을 부여하였다. 국제사회에 한국의 입장을 분명하게 알려 한국의 혼이 살아 있음을 알림과 동시에 국내와 국외 한국인들의 단결을 통해 국권수복을 도모하려는 장기적 목표였다. 실제로 헤이그를 떠난 이상설·이위종은 그런 목표를 수행하다가 1919년 전후 러시아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

또 한 사람의 특사인 헐버트는 미국에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사정을 미국에 소개하였다. 이 모두 헤이그 특사 파견 당시 부여받은 사명의 연장이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949년 광복절에 참석할 외국인 귀빈으로서 헐버트를 우선적으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노령에 오랜 항해로 쌓인 여독이 겹쳐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문병을 간 이승만과 병상에 누워있던 헐버트는 두 손을 부여잡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 헐버트는 운명하였다. 반 백년 이어진 헐버트의 헤이그 특사 사명은 그렇게 종결되었다.가난하고 취약했던 대한제국, 모두가 그 약소국을 조롱하고 매도하던 시대에 헐버트는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장점을 꿰뚫어 보고 평생 한국을 돕고 격려했다. 그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고맙고도 정의로운 세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