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고종 황제의 또 다른 헤이그 밀사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26 ~ 1949.8.5)의 20대 모습. 23살인 1886년 7월 5일 제물포에 당도했다. [사진출처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고종 황제의 비밀 특사(밀사)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던 네델란드 헤이그에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지만 일제의 방해공작과 국제정치의 냉엄한 벽에 부딪쳐 이국 땅에서 분사(憤死)한 이준(李儁, 1859.1.21~1907.7.14) 열사의 114주기를 맞았다.

통상 1907년 ‘헤이그 밀사 3인’ 하면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떠오르지만 이위종은 통역을 맡은 젊은이였고, 실제로는 이준, 이상설과 더불어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26 ~ 1949.8.5)가 고종의 또 다른 밀사였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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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코로나19 거리두기로 13일 전화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출처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미국 JP모건체이스 한국 회장을 역임한 ‘국제금융인’ 김동진(71)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은 13일 <통일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국독립운동의 횃불이었다”며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헐버트 네 분의 애국심을 본받아서 국민들도 나라사랑에 적극적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고종 황제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헐버트 박사와 이준, 이상설 등을 밀사로 파견해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 한 ‘헤이그 밀사 사건’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후 의병활동과 3.1운동 등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감옥에서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일본 경찰에 공술했던 사실만으로도 그가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김동진 회장은 “1906년 6월 22일 헐버트 박사가 먼저 특사로 임명됐고, 특사 조직은 헐버트 박사를 잘 아는 사람들로 구성됐다”며 “헐버트 박사와 이준, 이상설 세 분은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선각자였고, 헐버트 박사와 이준 열사는 너무 가까운 분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널리 알려진 헤이그 밀사 3인.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자료사진 - 통일뉴스]
널리 알려진 헤이그 밀사 3인.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 회장은 “당시에 일본의 감시가 심한 때였기 때문에 헤이그 사건은 전모가 기록으로 남은 게 거의 없다”고 전제하고 “헐버트 박사는 한국 특사들을 돕되 우리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던 9개국 원수들에게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문제가 토의되도록 설득하는 역할이었다”며 “고종 황제가 이원화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 멀지도 않은 과거지만 ‘역사적 사실’의 흔적은 불분명한 것들이 많다. 고종 황제로부터 특사 위임장을 직접 받았는지의 여부부터 이준 열사의 사인(死因)까지.

김 회장은 “헐버트 박사가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났는지 저도 솔직히 잘 모른다”며 “일본의 감시가 심했고, 특사증을 받았다고 단언하지 못 한다”고 말했다. 고종 황제의 어새(御璽)가 찍힌 백지만 받아서 나중에 독립운동가들이 작성했다는 설도 있다고.

그러나 분명히 밝혀진 사실 중에서도 잘못 알려져 있거나 다른 주장이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김 회장은 이양재 (재)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의 <통일뉴스> 인터뷰(2016.12.31)에 대해서도 몇 가지 사실 관계를 짚었다. [관련기사 보기]

고종황제 옥새가 찍힌 헐버트 박사의 특사 위임장. 직접 수령 여부와 작성 경위 등이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사진출처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고종황제 옥새가 찍힌 헐버트 박사의 특사 위임장. 직접 수령 여부와 작성 경위 등이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사진출처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먼저, “돈 문제로 그 분들의 이름에 조금이라도 오점이 생기는 것을 저는 아주 불쾌하게 생각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고종 황제가 헐버트 박사한테 이준 열사의 경비를 줬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고 아무 근거도 없다”며 “전혀 터무니없다”고 강조했다.

이양재 이사장은 <통일뉴스> 인터뷰에서 “그런데 고종황제가 이준한테 돈을 안 줬다. 그 돈을 누구한테 줬는가 하면, 내 판단에는 헐버트에게 준 것 같다”고 추정했다. “헐버트가 고종황제한테 받은 경비를 본인이 많이 썼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면 사실은 떼먹은 것 같다”는 추정까지 내놓았다.

김 회장은 “헐버트 박사는 자서전에 ‘나는 내가 업무를 수행해야 할 경비 하고 대한제국으로부터 관립중학교(현 경기고) 교사로서의 봉급 이외에 하나도 조선의 돈을 축내지 않았다’고 써놓고 돌아가셨다”고 반박하고 “상식적으로 이준 열사가 4월 22일 서울에서 출발했고, 헐버트 박사가 5월 8일 출발했는데 당시 상황에서 이준 열사에게 돈을 전해주라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헐버트 박사가 헤이그에 도착해 이미 와 있던 이준 등 다른 특사들을 만나지 않고 “무책임하게” 미국으로 가버렸다거나 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에야 국내에 들어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헐버트 박사 자서전에도 분명히 헤이그에서 다른 특사들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고, 이위종이 7월 9일 연설한 헤이그 피스클럽에서 헐버트 박사가 7월 10일 기자회견을 했다는 객관적 사실이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헐버트 박사가 서둘러 미국행을 택한 것은 미국 대통령에게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고 강조했다.

또한 정부수립 이전에도 국내를 다녀갔다며 “헐버트 박사가 1909년 한국에 올 때 일본이 죽일지도 몰라 부인에게 유서를 남기고 왔고, 그 유서가 저에게 있다”고 확인하고 “베를린에서 권총을 사서 남대문역에 권총을 품고 내렸다”고 전했다. 특히 고종 황제가 중국 상하이 덕화은행에 보관된 내탕금을 찾아서 나라를 위해 써달라며 헐버트 박사에게 준 1909년 10월 20일자 친필 위임장의 존재를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헐버트 박사는 한 분야에만 머물러 있던 분이 아니고 교육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선교사, 아리랑 채보자, 황제의 밀사, 톡립운동가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신 분”이라며 “한국을 우리 이상으로 정말로 사랑하신 분”이라고 요약했다.

헐버트 박사는 평소 바람 대로 한국 땅에 묻혔다. [사진출처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헐버트 박사는 평소 바람 대로 한국 땅에 묻혔다. [사진출처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헐버트 박사의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언은 1949년 42년 만의 방한 1주일 후 병사함으로써 현실이 됐다.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한 뒤 지금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영원히 잠든 것.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태극장(현 독립장)을 추서했고, 2014년 한글 발전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2010년 헐버트 박사의 평전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참좋은친구)에 이어 2019년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참좋은친구)를 쓴 김 회장은 한글 띄어쓰기는 1996년 1월 월간「조선소식 The Korean Repository」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한글 띄어쓰기는 헐버트 박사가 영문편집자로 참여한 독립신문 발행을 계기로 정착이 됐다”며 “존 로스 스코틀랜드 선교사가 중국 심양에서 1882년 한글 누가복음에서 띄어쓰기를 했다지만 국내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우리 국민들은 헐버트 박사를 비롯한 외국인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모른다”며 2019년 기준으로 외국인 훈장 수여자는 70명이고 이 중 중국인 33명, 비중국인 37명이라고 소개하고 “특히 37명의 외국인은 개인의 양심과 정의에 의해 독립을 도왔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매해 8월 5일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8월 31일 열릴 예정이다. 사진은 68주기 추모식 모습. [사진출처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매해 8월 5일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8월 31일 열릴 예정이다. 사진은 68주기 추모식 모습. [사진출처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1999년 발족한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역사 발굴과 허버트 박사 기념사업을 과업으로 삼고 있으며,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글을 받아 영문 묘비에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한글 묘비명을 써넣는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해왔다. 매년 8월 5일 거행해 온 추모식은 코로나19로 인해 올해는 8월 31일로 예정하고 있다.

1999년 기념사업회 설립 당시 부회장을 맡아 2004년부터 회장을 연임해 온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는 생전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the most remarkable people in the world)’이라며 한민족이 언젠가 세계 속에 우뚝 설 것이라고 확신했다”며 “우리 청소년들이 헐버트로부터 교훈을 얻어 남북의 평화통일을 이루고 세계 속에 우뚝 서는 날을 앞당기자는 당찬 결기를 다졌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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