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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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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 조회 1,359회 작성일 20-11-1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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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다녀왔습니다.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회원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저는 지난 2008년 4월 26일부터 4월 30일까지 북한 단군민족통일협의회 초청으로 단군 문화유적 답사단의 일원으로 성창훈 이사, 홍보실장과 함께 북한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방문단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래 정부관련부처 승인하에 남쪽에서 방북한 최초의 단체 방문단이었으며, 또한 저희 방문단의 목적은 유적답사와 더불어 남북간 민간교류의 회복과, 강화를 북측과 협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방문단의 구성은 한민족단체연합의 도천수 대표를 비롯한 6인과 독립유공자 유족회 김삼열 회장을 비롯한 7명등 총 15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저희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는 헐버트박사가 독립유공자이시기에 독립유공자 관련단체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방문일정 및 북측과의 대화 요약

4월 26일 12시 심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얼마 안있어 심양에 도착하여 이어서 바로 오후 4시 평양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긴장된 마음으로 고려항공 카운터로 서둘러 달려 갔다. 거기에서 첫번째로 북한사람과 조우하게 되었는데 건장하고 잘생긴 40대 초반의 남자가 우리들을 안내했다.

성이사, 강실장, 필자는 평양행이 처음이었고 그동안 북한사람과의 만남이 없었으므로 긴장과 호기심이 계속 요동치는 가운데 평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오르자 우리가 TV등에서 보던 모습의 미모가 출중한 승무원들이 친절하게 좌석에 안내해 주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기내에서 주는 북한 사이다를 마시자마자 어느새 순안공항에 착륙한다고 기내 방송이 나왔다.

서울에서 아침에 출발할 때는 비가 내렸는데 평양하늘은 여느 남쪽 하늘과 똑같이 푸르렀고 주위의 산하도 우리의 봄날처럼 연초록의 신록이 우리의 마음을 긴장감과 함께 들뜨게 했다. 평양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가슴이 벅찼다. 봄바람과 함께 심장이 요동치며 이 땅을 밟기가 이토록 힘들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흥분이 넘쳐났다.

이어서 우리들은 귀빈용 수속실로 안내되었다. 해외여행을 숱하게 해봤지만 공항 귀빈실은 난생 처음으로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평양에서라니까 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를 마중나온 분은 단군민족 통일협의회 부위원장과 그 일행이었다. 부위원장은 70대 초반의 학자풍의 선비같은 인상을 주었으며 우리와 같이 지냈던 4박 5일 내내 우리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후일 알고보니 부위원장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남쪽에서도 두 분 다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에 추서된 사람들이었다.

우리들은 대동강의 섬인 양각도에 있는 양각도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평양의 특급호텔인 48층의 양각도 호텔의 시설은 관리의 미비로 특급호텔에 비하면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투숙하기에는 전혀 손색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양각도호텔이 자랑하고 있는 것은 48층에서 내려다보는 평양시가지와 대동강을 바라보는 빼어난 조망이며 또한 평화로운 주변경관이다. 호텔 바로 앞에 9홀의 골프장이 있고 또한 능수버들에 둘러싸인 대동강변을 걸을 수 있다.

호텔에 여장을 푼 우리일행은 늦은 환영만찬에 참석하여 북측과 공식적인 만남을 했다. 평양에 처음 온 우리일행은 아직도 긴장이 가시지 않았지만 저녁만찬은 비교적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남북양측 인사들의 공식적인 소개가 있었다. 늦은 저녁이 끝나고 여행에 지친 몸을 깊은 잠으로 달랬다.

4월 27일은 아침 일찍 한식당에서 아침을 했다. 우리가 평양에 머무는 동안 주로 한식을 먹었는데 북한의 한식은 우리가 일류호텔이나 최고급 음식점에서만 먹어서 인지 중식요리처럼 코스식으로 나오다 보니 항상 양이 많았다. 음식은 담백하고 건강식 위주로 되어있었다. 아침식사 후 우리는 만경대 김일성 생가를 방문했다. 30대의 여성 안내원은 너무나도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김일성주석의 가문과 어린 시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어서 우리 일행은 대동강 동쪽에 위치한 주체사상탑을 방문했다. 주체사상탑 전망대에서는 평양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이어서 개선문에 들렀으며 평양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단고기 집에서 점심을 했다.

우리가 처음 본 평양거리는 평온했다. 차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도시가 활기 차고 안정감이 있어 보였다. 특히 눈에 띄는 구호가 있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라는 구호였는데 다른 구호들에 비해서는 딱딱하지 않은 구호라고 느껴졌다. 또한 필자는 50개의 볼펜을 가져갔는데 우리가 유적지를 방문하는 동안 북측의 청소년들과 안내원들에게 기념으로 주었는데 참으로 요긴하게 쓴 것 같다.

오후에 들어 우리 일행은 단군능을 방문하면서 능의 위용에 놀랐으며 아울러 안내원은 단군의 존재에 대해 신화가 아닌 역사로 입증했다고 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단군의 뼈를 세계 과학계가 인정하는 ESR로 나이를 측정한 결과 5011년으로 추정했으며 오차범위는 플러스 마이너스 5%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의 탄생 년도와 비슷하다고 했다.

저녁에는 북측과 공식회의를 가졌다. 필자는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와 개인적 관심사에 대해 토의했다. 먼저 서울에서 가져온 헐버트박사에 관한 자료와 헐버트박사가 1891년에 저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교과서인 사민필지를 기증했다. 아울러 헐버트박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헐버트박사를 북측에서도 연구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부위원장은 미국인들 중에 조선을 위해 좋은 일을 한 사람이 많다면서 사회과학원에 연락해서 북쪽의 연구상황에 대해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아울러 필자는 헐버트박사가 북쪽에서도 독립운동가로 추앙될 것을 주장했다. 이 점에 대해서도 먼저 사회과학원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추후 논의 하자고 했다.

아침식사를 한 우리는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 능을 방문해다. 잘 정돈되고 능의 위용이 대단했다. 특히 능 주변의 나무는 주목으로서 너무나 우람했으며 경관이 빼어났다. 이어서 우리는 고려호텔에서 그 유명한 평양냉면으로 점심을 했다. 냉면은 메밀로 검은 색이었으며 쫄깃쫄깃한 점이 서울에서 먹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으나 맛있게 먹었다. 점심 후 우리는 평양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모란봉으로 향했다. 모란봉으로 가는 도중 베이징올림픽 성화봉송을 환영하는 북한 주민들이 인공기와 중국기를 들고 양쪽 인도에 늘어서 있었는데 우리들의 차가 성화가 도착하기 전 그 길을 먼저 달렸다. 북한 주민들은 간간이 우리버스에 박수를 보냈으며 우리는 느닷없이 대규모 군중의 환영을 받는 기분으로 모란봉의 을밀대에 도착했다. 을밀대에 도착해 대동강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을밀대 주변 경관은 너무나 수려했으며 이곳에서 바라본 대동강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특히 필자는 북쪽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지금은 작고하신 선친으로부터 을밀대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들었는데 정말 가슴이 뛰었다. 을밀대에서 채승대 쪽으로 난 오솔길도 가 보았으며 을밀대의 경관에 취해 발길이 옮겨지지가 않았다. 이어서 칠성문도 구경했다. 칠성문에서는 일제시대 경평축구 전을 벌였다는 모란봉 경기장이 보였다. 칠성문을 내려와 지난 3월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이 와서 공연했고 1948년 김구선생 등이 참석한 남북한 연석회의 장소인 모란봉 국립극장을 방문했다.

이어서 우리일행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는 평양 교예극장에서 서커스를 관람했다. 필자는 평소 서커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수들에게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점이고 나 스스로 서커스의 아슬아슬함이 싫었다. 그러나 이번에 관람한 평양 서커스는 면모가 달랐다. 아이스링크에서의 율동, 동물을 등장시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관중과의 일체감 등 관중친화적인 연출을 했다. 관중들은 박장대소하며 손뼉을 치며 출연자들과 호흡을 같이 했다. 물론 공중에서의 체조 등 아슬아슬함이 없지 않았으나 안전장치가 잘 되어있어 아찔아찔한 순간은 많지 않았다. 평소에 서커스를 즐기지 않았지만 이번 서커스 관람은 기분이 좋았다.

숙소에 돌아온 우리는 북측 관계자 없이 우리끼리만 한식으로 저녁을 하면서 그간의 일정에 대해 소감을 나눴다. 4일째 되는 날은 필자가 그토록 고대했던 묘향산으로 떠났다. 평양에서 약 2시간 3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고속도로는 커브가 거의 없이 똑바로 놓여져서 가도가도 굴곡이 없는 길이 인상적이라고 김삼열 회장께서 특별히 고속도로에 대한 감탄의 말씀을 했다. 편도 2차선인 고속도로는 차가 드문드문 있었으나 주민들이 고속도로를 중간중간 건너는 사람이 있기에 속도를 계속해서 낼 수는 없었다. 묘향산으로 가는 중 우리는 모처럼 북측인사들과 함께 노래자랑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 강실장이 영어 노래를 불렀는데 북측인사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영어를 잘한다고 했다.

묘향산 입구에 도착하니 묘향산의 자태가 서서히 눈 안에 들어왔으며 우리들은 묘향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평소 묘향산을 보기를 소원했던 필자는 묘향산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1909미터인 묘향산의 나무들은 봄의 신록과 함께 너무 아름다웠으며 계곡도 깊었고 산의 위용도 대단했다. 백두산은 민족의 성산이고 금강산은 바위가 많은 등 남성적인 산이라고 한다면, 내장산은 부드러운 여성이요, 묘향산은 미모와 깊이가 공존하는 완벽한 여인이 아닌가 싶다. 우리 일행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외국인사들로부터 받은 모든 선물을 1분씩만 구경해도 1년 반이 걸린다는 20만 점이 넘는 선물을 전시한 국제친선 전시관을 관람하고 묘향산의 자태를 마음껏 즐겼다.

필자는 북측의 요청에 따라 묘향산 방문글을 남겼다.

묘향산을 바라보며
묘향산아, 네 어찌 이리도 아름다우냐!
묘향산아, 너를 보고 있노라니 숨이 막힌다..
묘향산아, 내 어찌 너를 두고 떠나겠느냐!
묘향산아, 내 꼭 다시 와서 너를 어루만지리!

우리는 시간 관계상 묘향산을 등산하지는 못하고 입구에서 묘향산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가을 단풍이 더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했다. 북측인사에게 필자가 다닌 세계 명산을 비교하면서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했더니 북측인사가 가을 단풍시즌에 부인과 같이 오라고 했다. 꼭 그리하고 싶다.

묘향산에 취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묘향산 호텔에서 송이버섯 등 채식이 주된 점심을 하고 평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평양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북측인사들과 송별만찬을 했다. 송별만찬은 너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북측 인사들과 진솔한 우의를 나누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일찍 일어나 버드나무로 둘러싸인 대동강변을 산책하면서 평양의 아침공기를 한껏 마셨다. 이어서 아침식사를 하고 호텔을 나서니 무엇인가 모르게 아쉬움이 남았다. 특히 양각도 바로 위지점이 1866년 조선의 개방을 요구하기 위해 대동강에 들어온 미국상선 General Sherman호가 평양관민에 의해 불탄 장소다. 이 사건 이 후 미국은 1871년 미군함정을 보내 강화도 앞에서 우리관군과 전투를 벌여(신미양요) 우리 관군이 완패하였다. 결국 우리와 미국은 한미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필자는 평소 차라리 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에 들어왔을 때 또는 신미양요 때 우리가 미국과 조약을 맺고 개방을 했더라면 우리는 아마도 청,노,일에 시달리지 않고 일본 식민지시대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공항으로 가기 전에 평양성의 동문인 대동문을 방문했다. 대동문은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으나 우리들을 위해서 특별히 개방했다고 했다. 우리들은 이 자리에서 숭례문의 화재를 떠올리면서 마음이 착잡했으나 대동문에서 바라본 대동강은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어서 우리는 인민학습관 앞의 인조 호수와 분수대가 있는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실컷 사진을 찍으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북측인사들과 작별을 해야만 했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4박5일 동안 같이 지내는 동안 당초의 긴장감이 편안함으로 변했으며 이는 우리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민족의 우수성을 내내 강조한 연로한 부위원장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비교적 젊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쉬움을 뒤로하며 우리는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심양으로 가는 도중 옆자리에 앉은 서울보다 평양을 더 자주 방문한다는 AP뉴스 책임자와 담소를 나누는 사이 금새 심양에 도착했다.

심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서울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일행들과 조만간 “쫑파티”를 하기로 약속하고 미리 작별의 정을 나눴다. 앞으로는 더 쉽게 평양에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들 뿐만이 아닌 우리 국민 모두에게 평양에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대해 보면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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